인격적 만남

혐오감을 주는 사람들의 특징은 인격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 성을 배우지 못해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나 하대 하기 일쑤입니다. 물론 외형적 말투나 무시하는 태도도 그렇지만 교묘하게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참지 못할 상황이 되면 마음 속 언어들이 표출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간혹 드라마를 보면 점쟁이 화면이 나옵니다. 점쟁이 말투 특징은 말이 짧고 명령어입니다. 그분 말을 안 들으면 뭐가 잘못될 것 같아 무섭습니다. 교주들이나 무당이나 미신은 말투가 마치 ‘협박’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존중하시고 인격적으로 대하셔서 그분의 일에 ‘동참’하게 하시고, 우리의 인격적인 순종으로 ‘함께’ 일해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미신과 종교의 큰 차이입니다. 교회서도 말투를 보면 미신을 믿는지 인격적 하나님을 믿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친밀 감을 신앙으로 가져가는 사람은 점점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타인을 인격적으로 대우할 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접하십니다. 그리고 인격적 순종을 기대하시며 기다리십니다.

나보다도 더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기때문에 딱히 내가 해야 될 일은 없는 것 아니냐… 하고 자기는 하나님께 ‘순종’한 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무기력하고 게으른 태도입니 다. 반대로 하나님이 하실 일도 스스로 해서 하나님의 수고를 덜어드리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양극단의 신앙적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울이 바울 되는 경우를 보면 간혹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로 그분의 주권이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떤 일을 이루어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분의 필요에 의해 ‘강권적으로’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서 그 결과를 보면 항상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개 목사님께서 은퇴를 앞두고 갑자기 방언이 터졌습니다. 그분은 ‘방언’은 천박한 것이라며 그 동안 방언 기도는 사모하지도 않았습니다, 40년 만에 사모하며 기도하다가 방언이 저절로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 동의’를 하지 않으면 40년이라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으면, 그분께서 나를 기다려 주시는 것인지 아니면 함께 일하고 계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기쁘고 즐겁고,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고 싶은지, 아웃에 관심이 깊어지고 기도하며 나누고 싶어지는지 살펴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살펴봅니다. 이것이 제가 성경공부 를 하는 이유입니다. 매주 화요일 성경공부가 진행 중입니다. 이디오피아 내시 겐다게가 이사야서를 읽습니다. 관원입니다. 지식인 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알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알려주시지 않으시면! 성령은 빌립을 보내십니다. 인격적 만남을 원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공부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