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2일(수) 벧엘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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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3:1~9>  노득희 목사    

신령한 자들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말할 수 없다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안타깝게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표면상 무척 신령한 교회로 보였습니다. 1장5~7절을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전도도 잘하고 언변이 무척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령한 언어를 잘 사용했을 것입니다. 은사도 풍성했습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며 신유의 은사도 있었습니다. 성경의 지식도 많았습니다. 재림 신앙으로 무장하였으니 봉사 충성 헌신의 정도도 남 달리 무척 열정이 있었습니다. 신령한 모습이 아닌가요?
 
1~3 형제들아 하고 부르는 바울의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듯 합니다. 형제들아! 참 따듯한 호칭입니다. 사랑과 배려 그리고 한 없는 이해의 호칭이지요.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많아 안타깝기도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조금은 실망과 서운함이 많을 텐데 호칭에서 바울의 깊은 연민이 묻어납니다. 벧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이렇게 부드럽고 따듯한 주님의 음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들아!”
그러나 그들의 신령치 못함 즉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닌 모습을 어린아이 같다고 지적을 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 신령한 자들과 어린아이 대조를 잘 보아야 합니다. 전도,은사,성경지식 그리고 헌신이 있는데 어린아이 같다고 합니다. 그럼 기준이 무엇일까요?

3절에 정확히 바울은 이렇게 어린아이 같음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줍니다. 시기와 분쟁 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으로 보이는 신앙적 표상들 그리고 직분도 있는데 그것이 신령함과 어린아이의 기준이 아니라 시기와 분쟁으로 기준을 삼고 있습니다. 시기와 분쟁이 있으면 어린아이입니다. 신령한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신령한 것은 보이는 신앙적 표식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 생활은 잘하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직분도 주어지는데 어린아이 같아서 시기와 질투로 늘 분쟁을 만드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Egoism” 자기 중심적 사람이 그렇습니다.
 
4.” 나는 나는” 하고 두 번의 반복이 이어지며 시기와 분쟁으로 결과 되어진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라는 분쟁이 나타나니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바울이 바울 편을 들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신령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스스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5~9.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보내서 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볼로를 보내서 물을 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는 즉 바울 게바 아볼로 뿐 아니라 고린도교회 모든 성도들은 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다! 아멘!
오늘 이 새벽에 아주 중요한 질문을 자신에게 해야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하나님의 교회 벧엘교회에서 나는 누구인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있지 않으면 육에 속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성도의 삶의 자세가 없으면 어린아이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령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만 존귀히 영광 받으셔야 한다!

찬양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