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1~11> 노득희 목사
부활,살아있는 자
어제에 이어 부활의 진정한 의미와 핵심적 가치를 전개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제자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됩니다. 이쪽 경험이 저쪽에 영향을 끼치고, 거꾸로도 영향을 끼칩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통해서 제자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지금 ‘살아있는 자’로 인식하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경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예수를 통한 절대 생명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살아있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살아있는 것을 뛰어넘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다시 부활했다는 말과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죽었던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린 사건을 전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바울이 제시한 부활 증인 목록을 다시 보십시오. 게바(베드로)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바울까지 나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여러 층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바울은 예수 추종자들을 박해하다가 나중에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의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나타나셨다는 말은 은유입니다. 경험되었다고 보는 게 정확한 겁니다. 노래를 작곡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소리가 자기를 찾아왔다거나 그림이 자기를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찾아왔다거나 나타났다는 말은 예술가들이 그것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시간대에 나타났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를 절대 생명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부활의 증인이라는 교회의 전통에 바르게 서려면 예수가 왜 우리에게 절대생명인지를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다른 이들에게 해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기독교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 개개인의 구원과도 직결됩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생각할 줄 모르면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문제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서 결국 삶 자체가 기독교 영성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평소에도 부활과 영생과 구원을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세상살이에 쫓겨서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는 분들도 있겠지만, 더 많은 경우는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 이미 알만한 것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한 공부를 차일피일 미룹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서 우리 영혼은 건조해지고 위축되고, 다른 한편으로 과민해지면서 삶 자체가 초라해집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초라해집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영혼의 건강도 아직 생기가 있을 때 챙겨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가 죽고, 무덤에 묻히고, 다시 살아났다는 복음의 중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절대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더 생생하게 느끼는 삶을 가리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죽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수명이 늘어서 1천년을 산다고 해도 그것이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닙니다. 영생을 확인하려면 우선 우리를 죽이는 힘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절망하고, 그 절망으로 인해서 죽음에 이릅니다. 우리의 삶은 부단히 인정 투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고 출세하는 것도 다 인정 투쟁이자 욕구입니다. 간혹 자식을 그런 대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욕구는 달성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정 투쟁에 매몰됩니다. 그래서 부활 즉 절대적 생명이 성도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 부할의 절대적 생명으로 오늘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자유함을 얻었으며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 생명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을 부활의 신앙으로 고백하며 사는 살아있는 성도의 삶이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 생명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