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17일(목) 벧엘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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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1~6> 노득희 목사

고향 나사렛에서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에서 갈릴리 호수까지는 대략 30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예수님이 가장 많이 활동하신 가버나움이나 디베랴 등이 모두 갈릴리 호수를 낀 마을들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 오기 직전에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오가시면서 많은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막 5장에만 세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고, 둘째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치료한 것이며, 셋째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친 것입니다. 각각의 사건은 군중들의 관심을 크게 끌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럴 때마다 자리를 피했습니다. 자신이 크게 드러나는 일을 경계하셨습니다. 세 번 째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야이로의 열두 살 된 딸이 큰 병에 걸렸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손을 붙고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시자 소녀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비밀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사렛으로 오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설교를 하신 겁니다.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막 6:2)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놀란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이미 앞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막 1:22) 당시에 가르치는 권위는 서기관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신학박사, 신학대학 교수에 해당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말하는 권위는 서기관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서기관들은 들은 것을 전달할 뿐이지만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것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놀란 또 다른 하나는 권능입니다. 막 5장에 나오는 세 가지 사건과 같은 큰 능력을 가리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인근을 다니시면서 행하신 일들을 전해 듣고 그렇게 놀란 것입니다.
 
고향사람들이 놀라워했다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것은 당시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마가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배척한 이유는 예수님의 가족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 그리고 예수님의 누이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잘 알고 있다면 더 잘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들은 거꾸로 배척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예수님의 고향에서 일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복음서기자들은 이런 불미스런 사실까지 보도하는 걸까요? 고향사람들을 이상한 사람들로 보면 안 됩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모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바르게 믿으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갈등의 전조를 마가복음 기자는 3:20절 이하에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가버나움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에 지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일행에는 물론 예수님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족과 고향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이해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위험인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향사람들만이 아니라 당시 종교전문가들이라 할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 그리고 최고 종교권력 기관인 산헤드린 의원들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도, 종교성의 문제도, 도덕성의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 인식이 제한적이라는 것이 핵심 문제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삶을 돌아보십시오. 인간 문명을 보십시오. 학교와 병원과 기업과 정치를 보십시오.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고향사람들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 일은 역사에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내 인식을 넘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무엇을 의존하시겠습니까? 이해,인식,지식,경험,나의 해석 능력? 아니요 예수를 배척하는 일에 쓰일 뿐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배설물을 뒤로 하고 오늘도 예수로 나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백부장의 믿음,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저는 그 사람이 참 좋습니다. 닮고 싶습니다.

찬양

예수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