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7~18> 노득희 목사
질그릇에 담긴 보배
바울은 스스로를 질그릇이라 표현하며 그 안에 보배를 담았다고 합니다. 참 놀라운 표현입니다. 보배를 한층 더 보배스럽게 만들기 위한 대조법을 사용합니다. 보배는 무엇인가요? 예수가 그리스도요 우리의 주인 이심을 보배로 말하고 있지요. 그럼 질그릇은 당연히 연약한 그리스도의 종 즉 부름 받은 일꾼들입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유약을 바르지 아니한 것입니다. 즉 광채도 없고 쉽게 깨지는 그릇입니다. 왜 그런 하찮은 그릇에 보배를 담을까요? 그것은 바울이 고백한 대로 능력이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확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동의할 것입니다. 적어도 구원받은 은혜 가운데 있는 성도라면요.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이것은 간과하여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보배를 보지 못하고 질그릇을 보면서 판단을 한 것이지요. 참 어리석은 모습인데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도 스스로에게도 열등감 자격지심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가 되어 시험에 드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판단할 때 질그릇도 나름이라고 분석 평간 비판 그리고 거부하기 까지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학위,능력,매력,카리스마,언변,외모,족보 등을 보면서 판단합니다. 거기에 맞추어 목회자들도 요구에 맞는 실력을 갖추기 위하여 가짜 학위까지 취득해야 하는 절박한 웃지 못하는 연출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지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는 가요?
먼저 예수의 탄생 기쁜 소식을 전하게 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누가복음에 의하면 목자들입니다. 목자들 하니까 어감이 좋아 보이는데 “양치기”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당대의 유명한 학자도 아니요, 덕망 있는 정치가도 아닙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는 여러 명의 양치기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름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전도의 미련 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미천한 양치기라도 한 사람 한 사람 모아서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전하는 도구로 쓰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12제자, 삭개오, 사마리아 여인, 막달라 마리아… 수 없이 많은 허다한 증인들을 성경에서 만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질그릇 같은 나를 부르신 것을 알고 그 질그릇 안에 보배가 되신 그리스도가 찾아와 나를 만나주시는 만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전도 입니다. 영주권만 받아도 알리고 싶고 나누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보배를 소유한 사람의 자랑이요 든든함입니다. “당신은 두렵지 않아 확진자가 너무 많아지는데?” “응 나도 실은 두려워 그런데 믿는 구석이 있어!” 두려움은 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미래에 소망 없는 사람처럼 살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질그릇 본인 자신이고 동시에 우리 모두 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말을 들었는데 자존감 자존심이 다 무너질 수 있지요.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리고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 앞에 오면 봄 눈 녹듯 두손들고 항복합니다. 상처 받았다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싫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며 그 아픔을 가슴으로 다 감싸 안습니다. 마치 보배를 질그릇 안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처럼 품어냅니다.
질그릇은 나의 가족이요 교인이요 이웃입니다. 상처 받기 쉽고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쓴 뿌리가 깊어 쉽게 변하지 않을 거 같은 기세로 분을 내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 입니다. 긍휼이 필요하고 치유가 필요하고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우리들 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보배 되신 예수가 계십니다. 공채도 없고 깨지기 쉬운 금이 간 질그릇이지만 그 틈새로 그리스도의 빛이 자꾸 나오고 있다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질그릇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쓰시는 질그릇!
아픔 상처 배신 실패 그 금이 간 틈새로 빛이 나갑니다. 그럼 된거지요…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의 빛이십니다. 아멘!